천연 석굴로 된 박해시대의 공소
죽림굴은 기해박해 후 각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한 천연 석굴로 1840년부터 1868년까지 28년간 공소로 사용되었다. 《최양업 신부 서한집》 제19신(1860년 9월 3일자, 죽림)과 《병인치명일기》(제21권 148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에 대재[竹嶺里]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성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지 기해박해(1839년) 이후 피난 다니던 신자들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다 정착했으리라 추정된다.
경신박해(1860년) 때 포졸들에게 잡혔던 동정녀 김 아가타가 죽림굴로 피신하여 신자들의 임종경을 들으며 죽었다는 사료와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이 죽림굴에 숨어 있었다는 《병인치명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대재 공동체가 각지에서 포졸을 피해 피난 다니다가 온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죽림굴은 석굴로 된 공소다. 죽림은 국내 유일의 천연 석굴로 한국판 카타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를 넘어 왕래한 피난 공소로 기해박해 후 충청도 일원과 언양 각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더욱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한 죽림굴은 1840년부터 1868년까지 28년간 공소로 사용되었다.
위 기록에 의하면 ‘이양등은 울산 죽령리(竹嶺里, 대재) 공소의 회장이며, 그 생업은 꿀 장사였는데 1868년 허 야고보와 김 루카와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대재 공소의 회장은 이양등임을 알 수 있다.
대재 공소 주변에는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곡식을 물에 불려 생식을 하며 생활하였다. 그 후 이 굴의 공소는 병인박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고, 특히 경신박해(1859~1860) 때에는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였고 마지막 서한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채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경신박해(1860) 때 언양 지역 상황에 대해 기술한 편지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 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분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 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 남은 신자들도 다 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 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졸들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한 여신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 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하략)
조선교구 사제 최 토 마 올림"
◆ 최양업 신부의 열아홉 번째 편지(죽림) ← 클릭하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죽림굴은 기해박해 후 각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한 천연 석굴로 1840년부터 1868년까지 28년간 공소로 사용되었다. 《최양업 신부 서한집》 제19신(1860년 9월 3일자, 죽림)과 《병인치명일기》(제21권 148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에 대재[竹嶺里]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성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지 기해박해(1839년) 이후 피난 다니던 신자들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다 정착했으리라 추정된다.

경신박해(1860년) 때 포졸들에게 잡혔던 동정녀 김 아가타가 죽림굴로 피신하여 신자들의 임종경을 들으며 죽었다는 사료와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이 죽림굴에 숨어 있었다는 《병인치명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대재 공동체가 각지에서 포졸을 피해 피난 다니다가 온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죽림굴은 석굴로 된 공소다. 죽림은 국내 유일의 천연 석굴로 한국판 카타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를 넘어 왕래한 피난 공소로 기해박해 후 충청도 일원과 언양 각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더욱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한 죽림굴은 1840년부터 1868년까지 28년간 공소로 사용되었다.
위 기록에 의하면 ‘이양등은 울산 죽령리(竹嶺里, 대재) 공소의 회장이며, 그 생업은 꿀 장사였는데 1868년 허 야고보와 김 루카와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대재 공소의 회장은 이양등임을 알 수 있다.

대재 공소 주변에는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곡식을 물에 불려 생식을 하며 생활하였다. 그 후 이 굴의 공소는 병인박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고, 특히 경신박해(1859~1860) 때에는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였고 마지막 서한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채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경신박해(1860) 때 언양 지역 상황에 대해 기술한 편지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 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분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 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 남은 신자들도 다 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 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졸들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한 여신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 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하략)
조선교구 사제 최 토 마 올림"
◆ 최양업 신부의 열아홉 번째 편지(죽림) ← 클릭하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억새벌길 200-78 (이천리 산 2) 200-78, Eoksaebeol-gil, Sangbuk-myeon, Ulju-gun, Ulsan |
지리좌표 | [굴 입구] 북위 35°32′82.7″ 동경 129°01′97.0″ |
연락처 |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
홈페이지 |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
미사시간 | [언양성당] 평일 : (월) 오전 6:30 (수목) 오전 10:00, (화금) 오후 7:3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30 (토) 오후 4:00, 7:00 |
교통편 | [승용차] 경부고속국도 서울산 IC에서 석남사 입구, 배내 고개를 넘어 간월산 휴양림지구와 죽림굴 안내판이 좌측에 7.4km를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산길을 따라 가면 간월재가 나오고 그곳에서 우측으로 산 비탈길을 내려가면 오른쪽 벼랑에 죽림굴이 있다. 또는 더 내려가서 3,5km라고 표시한 곳에서 산길을 오를 수도 있다. 새로 포장하여 차로 죽림굴까지 오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