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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행자가 낯선 지방을 여행하다가 황무지를 만났습니다.
그곳은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잡초 분이었습니다.
한참을 걷던 여행자는 양을 치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여행자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따뜻하고 정성이 담긴 음식을
대접 받으며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헌데 여행자의 눈에 이상한 점을 할아버지에게서 발견한 것은
언제나 집을 나설 때, 큼직한 자루에 도토리 백 개 정도를 담아
허리에 차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나가서는 소유주가 누군지 모르는 할아버지가 양을 치며 지나는
곳마다 도토리를 심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여행자는 할아버지 사시던 곳이 떠올라
다시 그 곳을 찾아 갔습니다. 그 사이 전쟁이 있었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할아버지가 꿋꿋이 심은 도토리는 숲을 이루고
녹음이 울창하여 시냇물이 흐르고 , 짐승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시 마을이 생기고 목장도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살 수 없었던 황무지가 낙원으로 변한 것을 보고
여행자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입니다.

   순교성지를 돌며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제일 작은 씨앗
겨자의 씨앗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씨앗이나 싹이 나서
자라면 새들도 날아와 둥지를 틀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성경말씀을 기억해보며 하느님의 말씀이 없었던 이 황무지에
혹독한 고초를 겪으며 말씀의 씨앗을 심으신 순교조상님들의
신심 깊은 순종으로 뿌린 그 씨앗이 아직 울창하지 않음을
반성하면서 울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편하게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을 누릴 수 있는 복을 받고있다는 생각 더불어 더 울창하고
아름다운, 말씀이 젖이 되고 꿀이 되어 흐르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얻고 왔습니다.
아마도 해미순교성당의 신부님 강론 중에 하신 『백색순교』를
즐거운 의무로 지녀야겠다는 영혼의 보약을 먹고 왔습니다.
  
또 일일이 성지를 안내하며 감동있게 설명을 해주신 신부님과 함께 동행하시며
도움말씀을 주신 두분 수녀님께 고마움을 흠뻑 받은 참으로 영혼은 즐겁고
복된 하루였습니다.



  • ?
    오서하(율리아나) 2013.06.08 21:38
    겨자씨의 믿음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기를 기도해요..

    나는 그 그늘 아래서 편지를 쓰겠습니다. ^^ 아멘

  • ?
    이상훈(요셉) 2013.06.10 23:39
    구한말때 우리 천주교우가 왜 그렇게도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는지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

    조선조(朝鮮朝)의 천주교 박해 :
    한국에서의 박해는 한국교회가 창설된 지 1년만인 1785년(乙未年) 3월(음)에 벌써 시작되었다. 중인(中人)인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는 그의 집에서 종교의 모임을 가졌다 하여 고문을 당하고 유배지(流配地)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 후 한국교회는 사대(四大)박해로 불리는 1801년의 신유(辛酉)박해,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 1846년의 병오(丙午)박해, 1866년의 병인(丙寅)박해를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박해로 신해(辛亥, 1791년), 을묘(乙卯, 1795년), 을해(乙亥, 1815년), 정해(丁亥, 1827년), 경신(庚申, 1860년)박해와 1901년 제주에서 민란(民亂)에 의해 피를 흘린 제주교난(濟州敎難) 등 잇단 수난으로 교회가 창설된 뒤 100여년 동안에 1만명에 헤아리는 순교자를 냈다.

    천주를 만유(萬有)위에 받들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천주교는, 과연 당시 국교(國敎)의 성격을 띤 유교사회의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천주교의 근대적 평등사상은 충효(忠孝)를 숭상하는 가부장적(家父長的) 봉건윤리와는 충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교(政敎)가 합일된 조선왕조의 유교사회에 있어서 종교는 사사(私事)일 수 없고, 어디까지나 국사(國事)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생활면(公生活面)에서 천주교와 유교간의 대립은 불가피하였고, 조선왕조의 정치 · 사회 · 가족 등 제도가 유교의 관습 · 제도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만큼 그 대립은 일층 심각한 문제였다.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정조(正祖)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이것이 이른바 ‘신해진산지변’(辛亥珍山之變)으로, 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을 당하여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살랐다 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어긴 죄목으로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충효를 절대적인 윤리로 여기는 유교의 봉건사회에서 양반가문의 일이고 보면 더구나 묵인될 수 없는 사회변혁적 대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내용에 관한 종교적 의미의 박해라기보다 유교윤리와의 충돌에서 오는 국가 이데올로기적 단죄(斷罪)였던 것이다. 즉 다른 사상과 종교를 모두 이단으로 보는 유교사상의 독재적 박해였다.

    1795년 을미년에 윤유일(尹有一) 등이 순교하고, 충청도 일대에 박해를 가하기는 했지만, 정조(正祖)는 성품이 온화하고 탕평책(蕩平策)을 견지하였으므로, 그의 치세에는 천주교에 큰 박해는 없었다. 그 시대의 박해는 주로 항상 노론벽파(老論僻派)가 남인시파(南人時波)를 꺼리고 질투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당쟁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경신년(庚申年, 1800년)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세는 일변하였다.

    정조의 뒤를 이은 것은 11세의 순조(純祖)였다.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金)씨가 섭정이 되었는데, 대비는 노론벽파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순조 원년(1801년) 1월 11일(음) 대왕대비가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선포하고,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짐없이 고발케 하여 근절을 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유(辛酉)박해이다. 그 결과 남인의 거두인 이가환(李家煥)과 권철신(權哲身)은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과 홍낙민(洪樂敏) 등은 순교하였으며, 이승훈(李承薰)이 처형되고, 정약전 · 약용(丁若銓 · 若鏞) 형제는 유배됨으로써 남인세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잠적하였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3월 12일(음) 자현(自現)하여 박해는 재연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온 독실한 여회장 강완숙(姜完淑)과 궁녀 등이 순교하고 주 신부는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9월 29일(음)에는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어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그가 작성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가 탄로되어 큰 파란을 일으키고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일변시켰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마치 천주교회의 가르침인 양 단정하고, 외세(外勢)를 불러들이는 매국도당으로 몰아 박해를 합리화시키는 구실로 삼게 된 것이다.

    이 해 12월(음)에 대왕대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교의 원수라는 것을 신조화시키려 하였다. 이른바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는 이 포고문은 천주교와 교도에 대하여 “매국노, 불효, 안녕질서의 문란자, 방탕” 등 온갖 중상과 모략을 동원하여 박해의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신유박해는 약 100명의 순교자를 내는 한편 4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을 유배시켰다.

    1839년 헌종(憲宗) 5년에 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른바 ‘사학토치령(邪學討治領)에 의해 시작된 이 박해는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퇴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를 꺾으려는 벽파 풍양 조씨(豊壤趙氏) 들의 책동에서 온 것이었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웠으나, 벽파인 풍양 조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안동 김씨의 관대한 정치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인 신부들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의 확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섭정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오라버니인 김유근(金逌根)이 중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자, 실권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업은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갔다.

    그 결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천주교도를 몰아세운 이 박해로 4월 12일(음) 남명혁(南明赫)과 궁녀 박희순(朴喜順) 등 9명이 순교하고, 6월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따라 체포되었다. 7월 1일(음)에는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수원에서 자현하고, 주교의 권고로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모방(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래서 8월 14일(음) 3인의 선교사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이튿날 유진길과 정하상이 서소문 형장에서, 나흘 후에는 조신철 등 9명이 순교하였다. 이때 정부는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교우들에게만 교수형을 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귀해일긔≫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여명이나 되었다. 기해박해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으나 규모가 광범했던 만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유식층의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퍼져나갔다.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에서 복음적 신앙으로 변해 간 것이 특징이었다. 교우들은 산간벽촌으로 모여 신앙의 이상촌을 이루는데 힘을 모았다.

    정하상은 순교에 앞서 호교문(護敎文)을 만들어 옥중에서 재상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에 전해지는 <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그는 이글에서 “옛 군자는 어떤 이단자라도 법으로 금하기 전에 반드시 그 뜻과 이치를 연구하였거늘, 어찌하여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그 기원과 전통을 조사도 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사도(邪道)로 규정하여 사형을 시키는 뜻이 어디에 있느냐”고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신랄히 비난하였다.

    헌종 12년(1846년)에 정부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김대건은 선교사들의 입국을 비교적 안전한 해로(海路) 개척하고자 서해의 등산진(登山鎭)까지 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마침내 7월 25일(음)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강변 사장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김 신부와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玄錫文) 등 남녀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고종(高宗) 3년(1866년) 대원군 치하에서 한국교회사상 최대의 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 박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南下政策)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초년에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고종 2년(1865년) 9월(음)에 러시아인들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왔고, 이어 승지(承旨)인 남종삼(南鐘三)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韓佛條約)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 인편을 보내어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달 뒤의 일이었다.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 남종삼은 주교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를 맞은 대원군의 태도는 너무나 냉담하였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얼마 전에 북경에서 조선사신이 보내온 서신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1860년 영불(英佛) 연합군에 의해서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청조(淸朝)의 위신은 물론, 한국의 고관들도 당황하여 피난 갈 궁리에 바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의 보복으로 중국 도처에서 양인살육(洋人殺戮)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여기에서 큰 힘이라도 얻은 듯, 천주교를 증오해온 보수적인 정부고관들은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교도들의 탄압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구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들고 나오자, 대원군은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들의 체포에 서명하였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불과 수개월 동안에 약 8천명에 달하는 교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게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생교회(自生敎會)의 전통을 지닌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사조와 같은 신앙의 생명력에 의해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이루고, 후일 신앙자유의 날을 맞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숙원이던 교계제도(敎階制度)의 설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순교한 선인들 가운데서 거룩한 성덕(聖德)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 세계에서 공경을 받는 103위 성인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교회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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