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생전 처음 들어보는 예수를 믿다.

김범우는 1751년(영조 27년)에 서울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 김의서와 어머니 이씨 사이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비록 신분은 중인이었지만, 국가의 외교업무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역관집안으로 널리 이름이 났다. 김범우도 역과 증광시에 합격하였고, 셋째 아우 적우도 역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김범우는 역관으로 근무하던 무렵부터 평소 외국정세와 문물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이벽∙이승훈 등 양반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1784년(정조 8년)에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권면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하였으며, 그 해 이벽의 집에서 봄에 북경에서 세례 받고 돌아왔던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와 함께 이존창, 최창현, 최인길, 지홍 등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김범우는 이후 윤지충, 최필공, 김종교, 홍익만, 변득중, 안성교, 허속, 조동섬,이중배 등 많은 사람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하거나, <천주실의>나 <칠극> 등의 교리서를 빌려주었다.
특히 그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았던 교우들에게 천주교 관련 서적을 빌려준 일은 교리를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또 김범우는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복동생인 이우와 현우를 입교시켰다.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이승훈이 영세하고 돌아온 후,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은 천진암에서의 연구와 실천기를 끝내고 모임 장소를 서울 수표동에 있던 이벽의 집으로 옮겼다. 당시 이곳에는 주로 양반계층의 남자 학자들이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언문이라고 부르던 국문밖에 모르던 일반 서민, 특히 중인과 천민계층까지 천주교의 가르침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분차별 철폐를 강조하는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초기 양반신도들의 깨어있는 의식과 실천, 그리고 김범우와 같은 중인들의 입교와 적극적 활동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또 초기 천주교회 창립자 부인들의 역할도 지대했다. 특히 이벽의 부인(병조판서 권암의 딸), 이승훈의 부인(정약용의 누이), 권일신의 부인(안정복의 딸) 등은 교리에 대한 신앙심과 당시 사회의 여필종부(女必從夫) 정신을 바탕으로 남편들을 따라 천주교를 믿는 동시에, 한문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 기도서와 교리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일반 민중들의 입교를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하층민 신도들이 양반인 이벽의 집에 모이기에는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집회 자체가 힘들어졌다. 김범우는 1784년 겨울부터 예상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장소로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양반과 상민들이 함께 모일 수 있어서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차별과 제약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즉 천진암에서 출발한 양반 남자들만의 천주교회가 수표동에 와서는 남녀, 장유(長幼), 반상(班常)의 천주교회로 각자 분리·발전되다가, 명례방에서 마침내 통합을 보게 되었다.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예배가 발각되다.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권일신 등 수십 명이 모여 신앙집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양반들과 신분이 낮은 중인의 집에 모인 것을 수상히 여긴 형조의 사령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안에 있던 물품들을 몰수하고 모인 사람들을 모두 형조로 압송하였다. 이것이 1785년(정조 9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분차별 철폐를 주장하던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전부터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경계하던 지식인들이 이를 빌미로 삼아 척사(斥邪)를 공론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훗날 진산사건 때 윤지충이 끌려왔을 때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했다면서 공술한 내용이다.
“갑진년(1784년, 정조 8년)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에 있는 중인 김범우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주실의》이고 하나는 《칠극》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워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는 이어 그 책을 돌려보냈습니다.
겨우 1년쯤 익혔을 때 떠도는 비방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책을 혹 태워버리기도 하고 혹 물로 씻어버리고 집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연구를 하고 학습을 하였기 때문에,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곳이나 함께 배운 사람도 없습니다.”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조>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조(신해)>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김범우의 집이 훗날의 명동성당으로…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압송되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 남인 양반 집안의 자제들인 것을 알고 곧 훈방 조치했지만, 중인신분이었던 김범우만은 그대로 투옥하고 모진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일신은 아들 상문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를 찾아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자신들도 김범우와 같은 천주교인이므로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형조판서는 그들이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는 양반임을 알고 회유하여 돌려보냈다.
형조판서는 김범우에게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학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김범우가 배교하지 않자 단양에 유배되었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도 기도문을 외우며,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러나 형조에서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유배된 지 1년 만에 죽어,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그는 조선 천주교사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지에 살면서 천주교신앙을 전파했다. 훗날 신유박해(1801) 때 김범우의 여섯째 서제 이우는 문초를 받고 장형을 당하던 중 죽었고, 일곱째 서제 현우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의 집이 최초의 천주교 예배 장소라는 역사적 의의에 따라 오늘날 그곳에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네이버 지식백과] 김범우의 집이 훗날의 명동성당으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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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는 1751년(영조 27년)에 서울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 김의서와 어머니 이씨 사이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비록 신분은 중인이었지만, 국가의 외교업무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역관집안으로 널리 이름이 났다. 김범우도 역과 증광시에 합격하였고, 셋째 아우 적우도 역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김범우는 역관으로 근무하던 무렵부터 평소 외국정세와 문물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이벽∙이승훈 등 양반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1784년(정조 8년)에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권면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하였으며, 그 해 이벽의 집에서 봄에 북경에서 세례 받고 돌아왔던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와 함께 이존창, 최창현, 최인길, 지홍 등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김범우는 이후 윤지충, 최필공, 김종교, 홍익만, 변득중, 안성교, 허속, 조동섬,이중배 등 많은 사람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하거나, <천주실의>나 <칠극> 등의 교리서를 빌려주었다.
특히 그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았던 교우들에게 천주교 관련 서적을 빌려준 일은 교리를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또 김범우는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복동생인 이우와 현우를 입교시켰다.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이승훈이 영세하고 돌아온 후,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은 천진암에서의 연구와 실천기를 끝내고 모임 장소를 서울 수표동에 있던 이벽의 집으로 옮겼다. 당시 이곳에는 주로 양반계층의 남자 학자들이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언문이라고 부르던 국문밖에 모르던 일반 서민, 특히 중인과 천민계층까지 천주교의 가르침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분차별 철폐를 강조하는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초기 양반신도들의 깨어있는 의식과 실천, 그리고 김범우와 같은 중인들의 입교와 적극적 활동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또 초기 천주교회 창립자 부인들의 역할도 지대했다. 특히 이벽의 부인(병조판서 권암의 딸), 이승훈의 부인(정약용의 누이), 권일신의 부인(안정복의 딸) 등은 교리에 대한 신앙심과 당시 사회의 여필종부(女必從夫) 정신을 바탕으로 남편들을 따라 천주교를 믿는 동시에, 한문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 기도서와 교리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일반 민중들의 입교를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하층민 신도들이 양반인 이벽의 집에 모이기에는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집회 자체가 힘들어졌다. 김범우는 1784년 겨울부터 예상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장소로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양반과 상민들이 함께 모일 수 있어서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차별과 제약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즉 천진암에서 출발한 양반 남자들만의 천주교회가 수표동에 와서는 남녀, 장유(長幼), 반상(班常)의 천주교회로 각자 분리·발전되다가, 명례방에서 마침내 통합을 보게 되었다.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예배가 발각되다.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권일신 등 수십 명이 모여 신앙집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양반들과 신분이 낮은 중인의 집에 모인 것을 수상히 여긴 형조의 사령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안에 있던 물품들을 몰수하고 모인 사람들을 모두 형조로 압송하였다. 이것이 1785년(정조 9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분차별 철폐를 주장하던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전부터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경계하던 지식인들이 이를 빌미로 삼아 척사(斥邪)를 공론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훗날 진산사건 때 윤지충이 끌려왔을 때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했다면서 공술한 내용이다.
“갑진년(1784년, 정조 8년)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에 있는 중인 김범우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주실의》이고 하나는 《칠극》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워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는 이어 그 책을 돌려보냈습니다.
겨우 1년쯤 익혔을 때 떠도는 비방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책을 혹 태워버리기도 하고 혹 물로 씻어버리고 집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연구를 하고 학습을 하였기 때문에,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곳이나 함께 배운 사람도 없습니다.”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조>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조(신해)>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김범우의 집이 훗날의 명동성당으로…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압송되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 남인 양반 집안의 자제들인 것을 알고 곧 훈방 조치했지만, 중인신분이었던 김범우만은 그대로 투옥하고 모진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일신은 아들 상문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를 찾아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자신들도 김범우와 같은 천주교인이므로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형조판서는 그들이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는 양반임을 알고 회유하여 돌려보냈다.
형조판서는 김범우에게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학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김범우가 배교하지 않자 단양에 유배되었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도 기도문을 외우며,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러나 형조에서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유배된 지 1년 만에 죽어,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그는 조선 천주교사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지에 살면서 천주교신앙을 전파했다. 훗날 신유박해(1801) 때 김범우의 여섯째 서제 이우는 문초를 받고 장형을 당하던 중 죽었고, 일곱째 서제 현우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의 집이 최초의 천주교 예배 장소라는 역사적 의의에 따라 오늘날 그곳에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네이버 지식백과] 김범우의 집이 훗날의 명동성당으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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