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공소순례]영천 화산공소[대구대교구 신녕성당]|작성자 빛둥이아빠
- 1893년 용평공소 설립!
- 1907년 용평성당 승격!
- 1912년 드망즈 주교에게 성당 축성!
- 1915년 대구성당(현 계산성당) 공소로 강등!
- 1919년 성당 재승격!
- 1935년 3대주임 남대영(델랑드 루도비꼬) 신부님 일제 종교탄압으로 용평성당을 떠나 삼덕당(예수성심시녀회) 설립!
- 이에 영천성당 공소로 재강등!
- 1967년 화산공립국민학교 이전하면서 학교를 개축하여 화산공소로 사용!
- 영천지역 천주교 발상지이자!
- 예수성심시녀회 발생지!
구 성전은 딱 봐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넓은 마당은 지금의 공소가 다가 아님을 알 수 있음!
문이 잠겨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넣어 보니 안에서 닫혀만 있어 조심스레 문 열고 들어가 사진 찍음!
구성전, 성전 모두 잠겨 있어 성전 안은 못 보았음
성모상 앞에 꾸며진 걸로 봐서 꾸준히 관리되고 있는 거 같음
아쉬움은 있었지만 역사를 보니 정말 잘 다녀 왔다는 생각이 듬!
[출처] [공소순례]영천 화산공소[대구대교구 신녕성당]|작성자 빛둥이아빠
상기 자료는 네이버 블러그 2019. 6. 16. 0:07일 빛둥이아빠님이 순례 다녀 오시며 쓴 글을 복사해 왔습니다
병인박해 직후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교우들로 설립되 공소
![]()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 살던 신자들이 팔공산(1192m) 줄기인 보현산(1124m)을 넘어 영천 지방의 질구지 옹기굴과 청도 구룡 등에 살기 시작하므로 이곳 영천 지방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듯하다. 그리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대창의 효일 부락의 이규일이 박해를 피해 구룡 공소로 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1880 년에 별세했다. 병인박해가 막 끝날 무렵인 1870년 초기는 순교자 김종륜 루카의 아들로 전해지고 있는 김종황이 부친의 순교 후에 대구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이곳 용평동에 이주해 옴으로서 더욱 확실히 복음의 전파가 활발해 졌다. ![]() 영천 지역의 성당은 1870년대 초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자들의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여러 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1885년(고종 22) 석촌동에 석촌 공소가 설립되었고, 1893년 석촌동에 살던 김태호 프란치스코가 용평동으로 이주하여 본인 집에 공소를 마련하면서 용평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881년경에는 화북면 용계동에 밀양 산내면에서 이사 온 현 화산 공소회장 이일만(디모테오)의 중조부가 이주해 왔고^ 또한 그때 이미 그곳 용계동에는 윤씨와 재령 이씨의 3가정이 살고 있었으며. 그리고 역시 병인박해 얼마 후에는 밀양의 삼랑진 욱실 공소의 김봉삼 회장 가정 등과 함께 온 신자들이 지일 공소에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9년의 파리외방전교회 연보에 의하면(1889년 연보 18-19p) 이보다 앞서 1887년 영천 지방에 유식한 교우 두 명이 있었는데, 이들의 선교로 48 명의 예비자가 생겼고、1888 년에는 이들 중 몇 사람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한 달간 구금되었다가 벌금을 물고 석방 되었으며,이들과 같이 구금되었던 전도사 김 라우렌시오는 옥중에시 열심히 전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보록 신부가 1888년 순회 방문한 38개 공소 중에는 영천이 포함되어 있다고도 기 록되어 있다. ![]() 그런데 이때 유력한 신자 두 명은 아마 당시 한학자로 입교한 김태호 방지거와 그 삼종숙(9촌)인 김노택 라우렌시오인 듯하다. 특별히 김태호 프란치스코는 석촌동 자택에서 서당을 차리고 훈장을 할때 대구의 유력한 신자인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권유로 영세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학생들이 없을 때 몰래 교리책을 읽다가 아이들이 오면 책을 요 밑에 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 입교를 한 후에 유림(儒林)들과의 접촉을 끊으니 일가친척들의 배척이 심하여 석촌동에서 용평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리고 그 후 1907년 5월에는 이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본당 신부로 이곳 출신으로 순교자 김종륜 루카의 손자 이며 김종황의 둘째 아들인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 하였다. 김 신부는 본당에 부임하자마자 즉시 사제관과 성당 건축 공사를 시작하여 몸소 노동일울 하였다. 이것을 보고 교우들도 따라서 더욱 분발하여 공사비가 적게 들고 공사도 쉽게 완공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당 신축비는 김태호 회장의 사비로 이루어졌으며 성당의 기와는 은해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성당 건물은 1912년 1월 6일 대구교구장 안세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성당 안에 서당을 개설하여 한학자인 초대 김태호 회장과 김노택 회장이 한생들에게 한문과 교리 공부를 가르쳤다. ![]() 1912년 용평 본당 소속의 신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6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15년 6월부터 1919년까지 용평 공소가 대구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가 1919년 11월 대구 본당 공소에서 용평 본당으로 재승격 되었다. 용평 본당의 3대 주임인 델랑드(L. Deslandes) 신부는 영천 외곽에 있는 용평 본당의 위치를 감안하여 중심지인 영천읍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전공소가 설립되었고, 이내 1936년 영천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일제의 종교 탄압으로 용평 본당의 주임 신부가 수녀회 지도 신부로 전임되면서 용평 본당은 영천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공소 공동체를 이어 오고 있다. 현재는 신녕 본당의 관할 공소로 남아있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의 80%이상이 천주교 신자이며, 영천지역 천주교 발상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톨릭의 역사가 깊은 곳이라 자부심이 대단하다. 화산 공소는 1929년 11월 6일 화산면 용평리에 화산공립소학교가 개교하면서 건축된 일제의 서양식 목조 건물을 개축해 설립되었다. 화산공립소학교는 후에 화산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1967년 화산면 유성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때 이 건물은 대구대교구 용평 천주교회에 불하되어 교사 내부와 복도 등을 개축해 화산 공소로 사용되었다. 화산 공소는 후에 그 옆에 신축 건물을 건립했지만, 목조 건물은 역사적 자산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 찾아가는 길 ![]()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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