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은 벽돌조 고딕양식으로, 1890년대에 건축된 대한민국의 성당 중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등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코스트(한자명 高宜善)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P. 시잘레(한자명 池士元)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이 8각의 종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다. 앞면의 출입구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벽감 모양의 아치로 하였다.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였다. 한때 답동성당의 옆에는 천주교 인천교구청이 있었다.(내용은 구글에서 검색))
인천교구 성모당은 성모에게 전구를 청할 수 있는 기도장소를 원하는 교구민들의 청원에 제2대 교구장 고(故) 최기산 주교가 응답하며 마련된 곳이다. 최 주교는 2015년 12월 ‘성모당 조성에 대한 사목서한’을 발표하고 2016년 5월 30일 갑작스레 선종하기 전까지 부지 선정과 설계 승인 등 성모당 조성을 추진했다. 최 주교의 선종 이후 교구는 그 뜻을 이어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인 2017년 기공식을 갖고, 2018년 10월 13일 성모당 봉헌미사를 거행했다. 돔 형태로 제작된 성모당은 중앙의 최대 높이가 11.55m에 달하는 건축물로, 파티마 현지에서 제작한 높이 2.3m의 성모상이 안치돼 있다.
파티마의 성모는 발현 당시 ‘세계 평화’와 ‘죄인·냉담교우들의 회개’를 강조했는데, 성모당은 이 메시지를 새롭게 전파하는 장소로 의미를 가진다. 성모당은 나아가 가정성화,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공간이다.
(내용은 구글 검색)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이승훈(1756~1801)의 묘이다.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 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1785년 서울 명동의 역관집안 출신인 김범우의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후, 몇 차례의 배교와 복교의 과정을 거치다가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정약조,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비록 몇 차례 배교했으나 조선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던 이승훈의 유해는 만수동 남동 정수장 뒤편 초곡산에 묻혔으나 1981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 만이 그의 아들 택규, 신규의 묘와 함께 남아있다.
(내용은 위키백과 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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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가 인천이라 설날 상경하며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 순교자 묘소 참배와 함께
제 딸 아이와 인천 답동성당, 성모당등 성지 순례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