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중에도 감사하자♡
감사하면 행복해진다.그래서 되도록 자주, 많이 감사해야 한다
일이 잘 되었을 때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때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도
감사해야 할까? 이에 바오로 사도께서는 "모든일에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라" 고
말씀하셨다.어떠한 경우라도 감사하라고 했지만 과연 고통 중에도 감사가 가능할까?
흔히 고통 중에는 감사보다는 원망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감사가 가능하다.가능하니까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고 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먼저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깨달아야 된다. 그래야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도 하신다. 욥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
또한 오상의 비오 신부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은 하느님이 고통을
주셔도 오히려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나는 우리같이 나약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느님이 앞서 말한 성인들처럼 우리에게 그러한
고통을 주신다면 우리는 모두 다 그 고통 때문에 나자빠지고, 주님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도 있다. 또한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고통으로 주님을
원망하다가 마침내 주님과 멀어질 것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한 할머니가 냉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사랑하는 어린 손자가 교통사고로 죽자 손자의 죽음을 하느님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냉담하는 것은 자유지만
손자의 죽음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말라고, 할머니의 손자를 죽인 것은
음주 운전자이지 하느님이 아니라고, 하느님께 누명 씌우지 말라고
말씀 드렸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원칙적으로 하느님이 주신것이 아니므로
하느님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되고 하느님을 원망해서도 안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하느님께 돌려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혹시 누명을 써 본 적이 있는가? 초등학교 때 옆자리 학생의 몽당연필이
내 발밑으로 굴러 오는 바람에 몽당연필을 훔친 누명을 쓴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억울했던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2천년 전에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때의 우리가 씌운 누명도 모자라 또다시 하느님께 누명을 씌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열심한 신자들 중에는 하느님이 고통을 주셨지만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고 하느님께 더 큰 사랑을 드리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언뜻 보기에 신앙심이 깊은 것 같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하느님을 더욱 화나게 만들지도 모른다. 잘못이 없는 하느님한테
잘못이 있다고 한 뒤 그분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몽당연필을 흠치지 않았는데도 훔친 것으로 단정하고 용서해 주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이러면 누구든지 너무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뛸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해서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버리거나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과연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넘어져서 무릅이 깨져도 감사할 수 있는가?
대답은 "그럴 수 있다." 무릅이 깨진 것 자체를 감사할 수는 없지만
코 안 깨진 것을 감사할 수 있다. 코가 깨졌을 때도 꼬 깨진것 자체를 감사할 수는
없지만 머리 안 깨진 것을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1천만 원을 잃었을 때 그보다 더 큰 돈을 잃지 않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더 큰 불행을 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30여 년도 지난 일이다. 원주 어느 성당 아침 미사후에 트레이닝복 차림의 신자가
봉투에 넣지도 않은 돈 몇 푼을 미사 예물로 주임 신부에게 주면서 감사 미사를
드려 달라고 했다. 늘 말쑥한 옷차림으로 매일 미사를 참석하던 그분이 오늘 따라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온 것도 예사롭지 않을 뿐더러 얼마 안 되는 현금을
봉투에 넣지도 않고 건네는 걸 이상히 여긴 신부가 감사할 일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분은 여러모로 갖추지 못했음을 미안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이렇게 감사할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글쎄 어젯밤에 불이 났는데
가재도구와 물건들은 모두 타 버렸지만 애들 셋과 아내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깟 재물이야 또 벌어 구입하면 되지만 사람 안 다친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동안 우리 가족을 지켜주신 주님께서 이렇게 또
지켜 주셨으니 빨리 감사드리고 싶어 봉투도 없이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집에 불이 났어도 원망하기는커녕 사람 안 다친 것을 감사히 여겼던 것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냐고 하며
그동안 주님께 봉사한 결과가 겨우 이거냐고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신앙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분은 그동안 성당에서 안 한 봉사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봉사를 했던 분으로"어떤 처지에도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을
잘 실천한 분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체험이 있다. 5년 전 안식년을 맞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인 요하네스버그에서 연수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저녁 식사 후에
피정의 집 마당 벤치에 앉아서 함께 연수온 신부와 환담을 나누며 쉬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서 기르던 큰개가 보이길래 오라고 손짓을 했고 내 앞에 다가온
개의 등을 쓰담아 주었다. 그러고는 앉으라 하면서 개의 등을 살짝 눌렀는데
그 개가 갑자기 머리를 들면서 내개 달려들었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이마를
스쳤다. 이마에서 뜨뜻한 것이 흐르는 것 같아 손을 대 보니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피정을 지도하던 젊은 신부를
찾아갔고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즉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상처를 치료한 뒤 붕대을 감은 채 밤늦게 피정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방에서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두 눈 사이에 상처를 입고
붕대을 감았는데 오른쪽 눈꺼풀에 실 같은 상처가 나 있는 것이었다.
아프지도 않았고 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1밀리미터만 오른쪽으로
개의 이빨이 지나갔더라면 나의 눈은 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각도가 조금만 틀어졌더라면 크게 다쳐 실명을 했을지도 모른다.아찔했다.
그런데 다행히 눈은 멀쩡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눈을 안 다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이마가 다친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고
약오르지만 눈이 안 다친 것을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하다.
사실 내가 안식년을 아프리카로 간 것은 새로운 체험을 하고 싶어서였고
그 체험담을 책으로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먼 아프리카에까지
갔는데 새로운 체험은커녕 미친 개에 물려 실명할 뻔했다.
눈을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드리며"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는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에게 말을 했다. "이보게 오늘 나에게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네. 정말로 감사한 일이지.주님 감사 합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어서 말해봐."라고 친구가 묻자 그는 "오늘 내가 성당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데 교통사고가 났네. 내 차가 자그마치 다섯 바퀴나 굴렀지.
그런데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네. 내가 얼마나 주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네. 자,이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정말로 감사할 일이군.그런데 나는 자네보다 훨씬
더 감사하다네." 놀란 그가 물었다. "아니,자네도 나와 같은 일을 경험했나?
그럼 자네는 여섯바퀴 이상 굴렀겠구먼?" 이 물음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다네. 즉,내게는 아무런 사고도 없었지.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할 일인가?"
맞는 말이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이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지금 자신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큰 은총이며
감사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
바로 큰 은총을 받고 있다는 표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아무런 은총도 내려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볼 일이다.
만일 우리가 불치의 암에 걸려 죽어 가는데 주님께서 낫게 해주신다면 크게 감사할
것이다. 아마도 온힘을 다해,모든 재물과 모든 시간을 다 바쳐,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암에 걸렸다가 치유된 것을 감사하기보다 처음부터 암에 걸리지 않았음을
더 감사해야 한다. 만일 눈이 멀었다가 치유되었다면 한없이 감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성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더 감사해야 한다.
내가 만일 하느님이라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감사할 줄 알도록 바꾸어 놓겠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을 암에 걸리게 만들어 놓고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한 다음
낫게 해 주면 얼마나 감사해야겠는가? 또는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린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들에게 인심을 쓰는 척 눈을 성하게 만들어 주면
그들은 한없이 감사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암에 걸리지 않게 해 주셨고 처음부터
눈멀지 않게 해 주셨다. 그렇다면 더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항상 감사하자.
- 박용식(시몬)신부님의 새로 출판한 예수님 따라 하기 중에서 -
저자 박용식 시몬 신부님은 1979년에 사제품을 받고 1981년부터 1986까지 원주교구
풍수원.학성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냈으며,1986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한 뒤,1991부터 2004년까지 원주교구 동해.황지.봉산동성당 주임신부를
역임하였다. 2004년부터 1년간 안식년(8개월은 아프리카에서 체류.3개월은 유럽
배낭여행을 보낸뒤 2005년 부터 현재까지 원주교구 횡성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예수님 흉내 내기>(가톨릭출판사 2004)가 있으며 가톨릭계 신문 및 월간지
등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또한 2009년 9월부터 2010년 4월까지 평화방송 TV 특강을 진행하였다.
<예수님 흉내 내기>,그 두 번째 이야기
저자 박용식 신부님은 평범한 시골 본당 신부로 살아오면서 겪은 소박하고 단순한
삶 속에서 체험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을 흉내내고 예수님을 따라 하는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글과 복잡한 방법이 아닌 단순하고 소박한
해법으로 예수님을 따라 하는 사랑의 기술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책을 통하여 독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함으로써 어둠 속을 혜매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랑의 빛을,자비의 빛을 비추어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더불어 자신도 기쁘고 이웃도 기쁘게 해 주는
삶의 지혜와 사랑을 많이 터득하시기를 빕니다.
- 추천의 글 중에서 -
|
이 죽일놈의 오만과편견
해탈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