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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 그 은총
1972년 2월 첫 서원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새벽 네 시, 교회의 차임벨 소리에 잠을 깨어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기상 종소리조차 못 듣곤 하는 이 잠꾸러기가 이게 웬일인가! 가만히 들어보니 10년 동안 장로교회에 다닐 때 찬양대에 서서 늘 부르던 찬송가였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주님께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리. 찬송가를 알아듣는 순간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임벨은 4절까지 부르라는 듯 네 번을 울렸다. 가사를 외우고 있던 터라 고요한 새벽에 숨을 죽이고 물면서 -한 방을 쓰는 동료가 깰세라-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날 위하여 가시관 쓰셨으니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리.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사랑)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리. 큰 영광의 구주 날 사랑하사 그 풍성한 복을 베푸시리니 금 면류관 쓰고 늘 찬송할 말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리. 이 날 새벽 이 순간부터 이 찬송가는 내 위로와 기쁨, 서원으로 바쳐드린 내 갈망의 열렬한 확인이 도었다. 그래서 동료 수녀들과 함께 하는 성령기도회에 소개하였고 1970년대 초기 수녀원 성령기도회에셔 가장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가 도었다. 지금까지 포교 베네딕도회 대구 수녀원과 서울 수녀원 '찬가'에 수록되어 미사 중이나 성시간에 즐겨 부른다. 그뿐 아니라 혼자 기도하고 싶을 때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떠오르는 이 찬송가를 부르노라면 주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이 가슴에 사무친다. 특히 미사성제 반주 차례가 되면 나는 시작이나 마침, 봉헌이나 영성체 때 오르간으로 어김없이 나의 애창곡을 치곤 한다. 예수 고난회의 주보성인이자 창설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말했다. ' 그대 영혼에 사랑을 간직하기를 바란다면 주님 사랑의 고난을 기억하시오' 사도 바오로는 아들같이 여기는 티모테오에게 권고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 그 분께서는 다위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티모테오1서 2,8) '예수님은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이시다'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정수, 복음 선포의 골자가 아닌가. 사도 바오로의 당당한 선포를 되새겨 본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린토1서 12,3). 주 예수 그리스도님, 영원에서 존귀하신 얼굴을 뵈올 때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며' (콜로사이 3,16).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으 이름을 부르리라. 주님으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채우오리다' (시편 116,12-14) 아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가지고 있었다.... 준비하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 갔다.(마테오 25,4+10) --백 젬마리아 수녀--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