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 통영 황리 공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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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손자 신순균 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있던 본당
![]() 고성에는 병인박해(1866년)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병인박해 전에 순교자 구한선(타대오)과 함께 거제도를 방문했다. 거제도에 교우들이 있었다면 고성에도 교우들이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뿌리는 정해박해(1827년)를 피해왔던 피난 교우들이다. 전북 장수에서 함양으로 건너온 교우들이 문산, 고성, 통영을 거쳐 바닷가로 흩어진 것이다. ![]() 1890년대를 전후하여 고성지역 몇 곳에 공소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도 기월리와 황리가 규모면에서 큰 신앙공동체였다. 황리 공소는 고성과 통영사이 천개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황리에도 오래전부터 교우들이 있었다는 공식 기록은 우도 신부의 1897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곳에 교우들이 나타난 것은 병인박해와 무진박해 이후로 여겨진다. 거제도와 통영인근 섬에 살던 교우들이 뱃길이 용이한 황리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그들은 육로를 통해 고성 내륙이나 문산 쪽으로 피신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연으로 황리 공소는 문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 되었다. ![]() 황리 공소는 전라도 지역을 장사 다니며 천주교에 눈을 뜬 이석오 루카와 지역유지 홍종모 데오필로 두 분이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우하면서 1893년 무렵에 공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석오 루카는 현 공소회장의 증조부가 된다. ![]() 1935년 6월 16일, 황리 공소는 황리 본당으로 승격되어 마산교구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손자 신순균 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1년 4개월 동안 재임하였다. 황리에 본당이 섰지만, 고성 쪽에도 신부를 보내줄 것을 꾸준히 요구했다. 그러던 중 자동차의 등장으로 뱃길에 의존하던 교통이 육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황리지역은 사양길을 걷게 된다. 황리 본당의 고성읍 이전은 1939년 5월 14일자로 발표되었다. 황리는 다시 공소가 되고 기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이다. 첫 주임은 서정도 신부였다. 그러나 서 신부는 여러 사정으로 황리 본당에 부임했고 그해 10월에야 고성 기월리 본당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황리 주임 고군삼 신부는 김천으로 이동되었다. 이리하여 황리 본당은 4년 만에 재위 신부 두 분으로 막을 내렸다. ![]() 지금은 안정 국가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아파트와 원룸이 빼곡히 들어서서 공소 위치를 찾기조차 어렵지만 1934년 공소가 준공되었을 때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기와 건물로 위용을 떨쳤다. 고성 본당 50년사에 의하면 1989년 현재 81세대 423명의 교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30세대 90여명이 등록되어 있고 주일 미사는 평균 50명 정도 참석한다고 한다. ■ 찾아가는 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