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 익산 석동 공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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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와 수도자들을 배출한 성소의 공소
![]()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선상에 있는 용안 지역은 앞에는 장수 수분리에서 내려오는 맑은 금강이 흐르고,뒤에는 용이 편히 쉬고 있다는 용두산을 기점으로 해서 약 12km 달하는 용두산맥이 용안,함열,황둥 등을 병풍과 같이 가로지르고 있다. 용안 지역은 1882년 두동 공소,1890년 곰골(웅동) 공소,1895년 석동 공소,1896년 성당리 공소,1897년 두무다리 공소, 1898년 댁말 공소, 1899년 입산 공소, 1900년 하댁말 공소가 설립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신앙의 역사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 익산군 용안면 석동리에 있는 석동 공소는 고산 되재에 살던 이 마리아 부부가 들녘올 찾아 강경으로 가서 방물 장사룰 다니다가 1885년 석동에 초가집올 마련하여 복음의 씨 ![]() 1925년경에는 어느 큰 집에서도 신자들이 다 모일 수가 없을 정도로 신자수가 중가하자 공소 건물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초대회장의 아들인 황하일(족보:회일) 아우구스티노 회장과 최두칠 바오로 등 신자들의 노력으로 1933년 가을 강당과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여 종탑이 설치된 강당 50평, 사제관 18평을 일본식 건물 양식으로 축조하였다. 강당은 왼쪽은 여자,오른쪽은 남자 교우청으로 꾸며졌다. 그후 1938년 6월 12일 석동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신부로 서병익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서 신부는 농한기에 노름하는 신자들을 불러 매질을 할 정도로 성격이 강직하셨다. ![]() 1942년 5월,초대 전라도 감목대리와 전주 자치교구장을 지낸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김양홍 신부가 7개월여 만에 광주 북동으로 전임된 후 신부 공석으로 본당이 잠시 폐쇄되었다. 1945년 7월에 이상호 아오구스티노 신부가 4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아오구스티노 신부는 프랑스 신부인 논산의 성 신부가 프랑스에서 가져 온 어린이 미사책을 번역하여 준 것으로 최초로 어린이 미사를 드렸다. 1949년 3월, 6대 주임신부로 하한주 신부가 부임하셨다. 1950년 12월 마산으로 전임되어 신부 공석으로 성당은 폐쇄되고 안대동 성당(현 함열 성당) 관할이 되었다. ![]() 석동 공소는 많은 사제와 수도자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하였다. 석동 공소 최초의 사제는 황인규 마태오 신부이며,전종복 사도 요한 신부,남종기 고스마 신부가 배출되었고, 이곳의 최초 수녀는 황하종의 큰딸 황금례 아네스 수녀이며,황인규 신부의 누이인 황정례 아네스, 집안 조카인 황혜숙 마리아,박 요안나,박경숙 루시아,신선희 모니카,남화자 실비아,남영화 히야친따,남정화 알비나,남형화 골롬바,최진영 베르타 둥 많은 수녀가 배출되었다. 특히 남종기 신부의 누이인 남화자 실비아 수녀는 논산 쎈쁠고등학교를 다니며 영세를 받아 집안에 복음의 씨앗올 뿌려 가족들을 모두 영세시켰으며, 아버지 남용선 요셉 회장은 20여 년간 공소회장을 하였다. ■ 찾아 가는 길 ![]() ■ 순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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