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지 안내 - 대구대교구 : 김천 서무터 공소

by 이상훈(요셉) posted Dec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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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 김천 서무터 공소
테마 분류 :: 사적지 지역 분류 :: 대구대교구 > 김천
   
병인박해 당시 형성된 착(善)함을 전하는 선무터[善武基] 교우촌

서무터 공소는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북도 거창군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대덕산(1290m), 수도산(1317m) 사이에 있는 형제봉(1022m)의 높고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증산면 소재지에서 성주 방향(30번국도)으로 200 여m쯤 가다 오른쪽(장전리. 황점리) 다리 방향으로 진입하여 봉답 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1.3km 들어가면 서무터 마을 언덕에 마당 왼편 성모님이 반겨주는 아담한 공소가 천주교 지례성당 서무터 공소이다.

서무터란 동명은 옛날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안착해서 살면서 착(善)함을 전하는 곳이라고 해서 선무터[善武基]라 하였으며, 훗날 서무터로 변경해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병인박해 때(1866∼1873)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병인박해 때인 1869년에 광주 안씨(廣州安氏)인 안주원(알로이시오 공사가) 가정이 충남 금산에 살다가 박해를 만나 포졸들이 막 저녁상을 받고 있을 때 들어닥치자 부인과 자녀 5명을 데리고 도망쳐 나와서 먼저 전라도 무주의 산막터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인접 군(郡)인 이곳 금릉군 증산면 서무터로 피난을 와서 안착을 하고 대를 이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피난지인 무주의 산막터에서는 양반이던 그가 마을 심부름꾼으로 어렵게 살고 있을 때 마침 이 고을에 새로 부임한 현감이 그의 사촌 동생임이 밝혀지자 그날 밤으로 그곳을 떠나서 이곳 서무터로 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먼저 현재 공소에서 조금 떨어진 사부랑골에 안착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 면서 몇 가정을 영세 입교시켜 함께 그의 집에서 주일 첨례를 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원황점 마을의 박씨 문중에도 전교를 해서 그의 딸을 출가시켰다. 그리하여 이곳 서무터와 바로 이웃의 마구일과 황점에 까지 전교가 되어서 황점에는 따로 공소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대를 이어 그의 아들 안도성(프란치스코)이 공소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부근에 더욱 많은 외교인들을 입교시켰다. 특별히 그는 이름난 한의원으로 의술을 통해서 더욱 자선 사업과 전교 사업을 많이 하였다.
병인박해가 끝난 후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김보록 신부가 이곳 서무터(마구실) 공소에 판공성사를 주러왔을 때 교세통계표(1882∼1883)에 의하면 44명이 신자가 있었고, 고백성사 33명, 영성체를 32명이 했으며 또한 8명의 예비자가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3년후의 교세통계표(1885∼1886)에는 31명의 신자가 살았으며, 30명이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장전2길 221 (장전리 144-1)
Jangjeon 2-gil, Jeungsan-myeon, Gimcheon-si, Gyeongsangbuk-do 
지리좌표 북위 35°86′90.1″ 동경 128°06′78.2″ 
연락처 지례 성당 (054) 434-6168 FAX (054) 434-6168 
홈페이지 없음 
미사시간 [지례 성당]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 오후 7:30 (금) 공소미사
주일 : 오전 10:30 (토) 오후 7:30 
교통편 증산면 소재지에서 성주방향(30번국도)으로 200 여m쯤 가다 오른쪽(장전리. 황점리)다리 방향으로 진입하여 봉답 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1.3km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