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 상주 감바우 (아천) 공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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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가 끝날 무렵 형성된 신자촌
![]() 감바우 공소는 박해가 끝날 무렵인 1900년을 전후해서 사실에 살던 신자들이 이웃 마을인 이곳에 이전해 삶으로써 차츰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공소 설립 당시 번창한 신자촌이 되었으며 현재 옛 신자촌이었던 배모기 지역 부근에는 오직 이 감바우 공소만이 있을 따름이다. ![]() 신자촌이 형성돤 후 이 마을의 유력자였던 이영복(이성우 신부의 증조부) 시몬이 구한말 양반들의 횡포 속에서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천주교에 입교했고, 1901년에 김천 본당 설립 당시 초대 김성학(金聖學, 1870~1938, 알릭스) 신부가 이곳에 와서 성사를 줌으로써 30여 명의 번창한 신자촌이 되었다. 또한 1921년에는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安世華, Demange, 1875~1938, 플로리아노) 주교가 이 공소를 방문하고 견진성사를 주었다. 이곳 신자들은 처음엔 초대 공소 회장 김한구의 집에서 첨례를 보다가 2대 이복영(시몬) 회장 때에 민가 집을 구입하여 공소로 개조하고 주일 첨례를 보았다. 그 후 정씨 집안(정재완 신부 선대)에서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사실의 이규진 회장이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에는 새로운 공소 건물을 건축하였다. ![]() 현재의 공소 부지는 3대 이복영 회장의 아들 이규권 회장이 희사한 것이다. 그 후 4대 이종윤 회장이 20년 동안 공소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공소가 더욱 번창해져 신자 수도 400여 명이나 되었다. 현재 공소 신자들은 교적상 140명(남 60명, 여 80명)이지만 상당수가 생계를 위해 도시로 나가 버려 현재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노인들만 40여 명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옛 신자촌이었던 배모기 지역 부근에는 오직 감바우 공소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만큼 근래 와서 몇 공소가 폐허가 된 상태다. 농촌 공소가 바로 우리 신앙의 뿌리며 모판이라는 점에서 옛날 공소의 유지가 절실하다. ■ 찾아가는 길 ![]()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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