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구 창설시 성모님께 감사 증거로 남기고자 만든 동굴
대구교구 창설 때 성모님에 대한 감사의 증거로 만든 동굴이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교구에 주교관,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성모당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떠 건축한 건물이다.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뜨고 가능한 한 루르드 성모 동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 흡사하게 하였다.
성모당은 교구청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배치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평면은 우측면의 뒤쪽이 안쪽으로 약간 꺾여 들어간 장방형으로 내부는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성모상을 봉안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기초 위에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과 수평띠를 구성하고 나머지 벽면에는 붉은 벽돌을 쌓았는데, 각 부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하고,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한 후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 동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916년 소세(Saucet, 蘇世德, 1877~1921, 요셉) 신부가 중병으로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 성당 증축 전에 성모 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고,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 동굴 정지 작업 공사가 시작되었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첫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 달 안으로 주교좌 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님께 허원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성모당 건립을 완성한 후 이의 완성과 그 과정에 대한 증거로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 배경과 함께 성모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세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드망즈(Demange) 주교
드망즈(1875~1938, 安世華) 주교는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189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1899년에 부산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 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 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대목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신설된 대구대목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 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 전교에 힘쓰다가 6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 루르드(Lourdes)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이 기간 동안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 위에서 14세 된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 Soubirous)[1933년 12월 8일 성녀 베르나데트로 시성]에게 발현하였다.
마지막 발현 때 성모는 자신을 일컬어 “원죄 없는 잉태”라고 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1854년) 교회의 교도권은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신앙을 교의로 선포한 바 있었다. 발현이 있었던 자리에 샘물이 솟아났으며 이 샘물로 목욕하거나 이곳에서 성체 강복예절을 할 때 질병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뿐 아니라,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적적인 회개와 은총을 체험하는 등 신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교회는 1862년 이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발현하신 성모의 요청에 따라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성당은 남 프랑스의 가장 웅장한 성당의 하나가 되어 있으며 루르드는 유명한 성지가 되어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이 발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1년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고(2월 11일)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전 교회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대구교구 창설 때 성모님에 대한 감사의 증거로 만든 동굴이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교구에 주교관,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성모당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떠 건축한 건물이다.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뜨고 가능한 한 루르드 성모 동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 흡사하게 하였다.

성모당은 교구청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배치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평면은 우측면의 뒤쪽이 안쪽으로 약간 꺾여 들어간 장방형으로 내부는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성모상을 봉안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기초 위에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과 수평띠를 구성하고 나머지 벽면에는 붉은 벽돌을 쌓았는데, 각 부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하고,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한 후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 동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916년 소세(Saucet, 蘇世德, 1877~1921, 요셉) 신부가 중병으로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 성당 증축 전에 성모 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고,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 동굴 정지 작업 공사가 시작되었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첫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 달 안으로 주교좌 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님께 허원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성모당 건립을 완성한 후 이의 완성과 그 과정에 대한 증거로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 배경과 함께 성모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세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드망즈(Demange) 주교
드망즈(1875~1938, 安世華) 주교는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189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1899년에 부산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 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 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대목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신설된 대구대목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 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 전교에 힘쓰다가 6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 루르드(Lourdes)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이 기간 동안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 위에서 14세 된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 Soubirous)[1933년 12월 8일 성녀 베르나데트로 시성]에게 발현하였다.
마지막 발현 때 성모는 자신을 일컬어 “원죄 없는 잉태”라고 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1854년) 교회의 교도권은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신앙을 교의로 선포한 바 있었다. 발현이 있었던 자리에 샘물이 솟아났으며 이 샘물로 목욕하거나 이곳에서 성체 강복예절을 할 때 질병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뿐 아니라,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적적인 회개와 은총을 체험하는 등 신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교회는 1862년 이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발현하신 성모의 요청에 따라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성당은 남 프랑스의 가장 웅장한 성당의 하나가 되어 있으며 루르드는 유명한 성지가 되어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이 발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1년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고(2월 11일)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전 교회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로4길 112 (남산동 225-1) 112, Namsan-ro 4-gil, Jung-gu, Daegu |
지리좌표 | [성모당 앞] 북위 35°51′66.3″동경 128°35′16.9″ |
연락처 | 천주교 대구 대교구청 대표전화 (053) 250-3016 |
홈페이지 | 천주교 대구 대교구청 http://www.daegu-archdiocese.or.kr/ |
미사시간 | |
교통편 | [승용차] 중앙고속도로 성서IC에서 달구벌대로로 계산5거리 까지 와서 우회전 [지하철] 명덕역 1번 출구-자동차 부속 골목-대구가톨릭대학 평생교육원 후문-교구청 [버스] 보성 황실맨션 앞 : 504,609, 838, 906, 910, 929, 600, 608 |